남들 앞에서 말을 잘하기 위한 10가지 테크닉

남들 앞에서 말을 잘하기 위한 10가지 테크닉

10년 넘게 남들 앞에, 그것도 무대나 청중 앞에 서도 식은땀을 삐질 삐질 흘리며, 다리가 후들후들, 긴장을 하는 소심한 사람입니다.

꾸준히 연습하고 하나 하나 따라해 보면 좋을듯 싶네요.

남들 앞에서 말 잘하는 10가지 방법을 소개합니다.

참고로 이 내용은 Guy Kawasaki가 Entrepreneur 잡지에 기고한 글을 많이 참조했다.

1. 재미있는 내용이 아니면 말을 하지 마라.

이 규칙만 잘 지켜도 80%는 성공한다. 뭔가 재미있는 내용이 없으면, 그냥 입 닥치고 집에서 잠이나 자라.

2. Sales pitch를 하지마라.

모든 강연/연설의 목적은 청중을 즐겁게 하기 위함이다. 이 점을 명심하고, 쓸데없이 자기가 다니고 있는 회사의 제품을 팔려는 영업적 목적으로 speech를 하지 마라. 만약 디지털 음악의 미래에 대한 강연에 초청을 받으면 자기가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제조하는 MP3 플레이어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말라는 말이다.

3. 청중을 즐겁게 해주는 데 집중해라.

이 점에 대해서는 많은 웅변 전문가들이 동의하지는 않지만, 어찌 되었던 간에 바쁜 사람들을 잡아놓고 그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면, 그 사람들을 즐겁게 해줄 의무가 speaker한테는 있는 거다. 강연이 재미있으면 그 사이사이에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있지만, 강연 자체가 재미없으면 게임 오버다.

4. 어떤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야기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해라.

한 12년 전에 어떤 강의를 들었는데, 내 나이 또래의 젊은 청중들을 대상으로 어떤 나이 많으신 분이 6.25전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열심히 떠들고 계셨는데, 시작한 지 한 15분 후에 방에 있는 사람들 절반이 나갔다. 어떤 사람들을 대상으로 연설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강연 시작하자마자 청중들에게 내가 당신들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전달되면 2시간 강연 내내 청중들을 압도할 수 있을 것이다.

5. 옷은 항상 잘 입어라. (Overdress)

반드시 청중들보다 옷을 잘 입어라. 청중들이 츄리닝을 입고 있으면 면바지에 남방을 입고, 청중들이 면바지에 남방을 입고 있으면 양복에 넥타이를 입어라. 청중들이 양복에 타이를 매고 있으면, 더 고급스러운 양복에 타이를 매라. 청중들보다 연설하는 사람이 옷을 후지게 입으면 이건 마치 “당신들보다 나는 더 똑똑하고, 돈이 더 많고, 더 잘난 사람이니까 이렇게 옷을 입은 거다. 꼬으면 출세해라.”라고 말하는 거와 같다.

6. 경쟁사 흉을 보지 마라.

강연하면서 경쟁사 흉을 보면, 이건 강의하는 사람한테 주어진 특권을 남용하는 범죄이다. 바쁜 사람들 붙잡아 놓고 강의하라는 부탁을 받았으면, 강의나 해라. 남 욕하지 말고.

7. 연설하지 말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라.

주제를 잘 설정해서 연설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story telling을 한다고 생각해라. 그 어떤 이야기라도 괜찮다. 어렸을 때 있었던 재미있는 이야기, 기억에 남는 고객에 대한 이야기 등. 위대한 연설자들은 관중들과 interactive한 대화를 한다.

8. 강의 전에 청중과 교류하라.

청중들을 조금 더 entertain하고 싶다면, 실제 강연 시간보다 더 일찍 가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이야기를 나누어라. 특히, 맨 앞줄에 앉은 사람들과 많이 교감하면 무대 위에 올라가더라도 친숙한 얼굴들이 보이기 때문에 그다지 긴장하지는 않을 거다.

9. 항상 행사 첫날, 오전 session에 강연을 해라.

잘 아시다시피 재미있는 연설자들과 중요한 speech는 (except for closing speech) 대부분 행사 초반에 있다. 3일 동안 진행되는 행사의 예를 들어보면, 첫째 날 청중의 관심도는 하늘을 찌를듯하고, 출석도 엄청나게 높지만 갈수록 그 수는 낮아지며 마지막 날은 거의 나가리 분위기다. 만약에 선택권이 있다면 (보통 없지…) 항상 행사 첫날, 그것도 오전 session에 강의를 하는 게 훨씬 좋다.

10. 큰 강의실보다는 작은 게 효과적이다.

이거 또한 선택권이 있다면 가장 작은 강의실에서 강연해라. 큰 강의실이라면 대학 강의실 스타일의 방을 선택해라 (책상이랑 의자가 있는). 작지만 꽉 찬 방에서 강연하면 더욱 더 청중과 공감대를 잘 형성할 수 있다. 200명을 수용하는 방에 200명의 청중을 대상으로 강연하는 게 1,000명을 수용하는 방에서 500명의 청중을 대상으로 강연 하는 거 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강연이 끝난 후 청중들 머릿속에서는 “와, 방이 꽉꽉 찰 정도로 인기가 많더라.”라는 인상이 지배적이지 “방이 작아서 그런지 꽉꽉 차더라.”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 거다.

11. Practice, Practice and Practice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이 11번째 tip이 가장 쉽고 중요한 점이다. 타고난 speaker들도 연습을 많이 하는 사람은 당할 수 없다. 이런 말이 있다. “Good speakers are born, but great speakers are made.” 아마도 이 말 뒤에는 made by practice and practice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을 거다. 강연할 내용을 최소한 20번은 연습을 해라. 15번 정도 연습을 하면 대략 내용을 외울 수 있을 것이다. 20번을 외우면 틀리지 않고 외울 수 있을 것 이다. 가족이 있다면 가족 앞에서 연습하고, 싱글이라면 개 앞에서 20번 연습을 해라. 개가 없다면 그냥 벽을 보고 연습해라. Practice makes perfect. 이거 이상도 아니고 이거 이하도 아니다.

마틴 루터 킹의 옥중서신

마틴 루터 킹의 옥중서신

I agree with you in the goal you seek, but I cannot agree with your methods of direct action”; who paternalistically believes he can set the timetable for another man’s freedom; who lives by a mythical concept of time and who constantly advises the Negro to wait for a “more convenient season.” Shallow understanding from people of good will is more frustrating than absolute misunderstanding from people of ill will.”

당신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에는 동의하나 직접적인 행동방식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치 부모님이라도 되는 양, 다른 사람의 당연한 권리에 대해 시기상조를 논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마치 절대적인 시기라는 것이 존재라도 하듯이 “좀더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 흑인들더러 기다리라고 조언합니다. 악의를 가진 사람들의 절대적 몰이해보다 더 힘빠지는 것은 선의를 가진 사람들의 어설픈 이해입니다.

You may well ask: “Why direct action? Why sit ins, marches and so forth? Isn’t negotiation a better path?” You are quite right in calling for negotiation. Indeed, this is the very purpose of direct action. Nonviolent direct action seeks to create such a crisis and foster such a tension that a community which has constantly refused to negotiate is forced to confront the issue. It seeks so to dramatize the issue that it can no longer be ignored. My citing the creation of tension as part of the work of the nonviolent resister may sound rather shocking. But I must confess that I am not afraid of the word “tension.” I have earnestly opposed violent tension, but there is a type of constructive, nonviolent tension which is necessary for growth.

혹자는 질문할지 모른다. 왜 쓸데없이 직접적인 행동을 하느냐고. 왜 점거농성을 하고 퍼레이드를 하느냐고. 사회적 합의가 더 좋은 방법 아니냐고. 맞는 말이다. 사실 이러한 행동들의 목적이 바로 사회적 합의이다. 비폭력적인 하지만 직접적인 행동은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고 긴장감을 조성함으로서 사회적 합의를 끈덕지게 거부해 왔던 공동체를 더 이상 사안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고 직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비폭력적 저항의 목적이 긴장 조성이라는 내 말에 경악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 나는 긴장이라는 단어를 겁내지 않는다. 나는 진심으로 폭력적인 긴장을 반대해왔으나, 건설적이고 비폭력적인 긴장이 없이는 보다 나은 사회를 이룰 수 없다.

In your statement you assert that our actions, even though peaceful, must be condemned because they precipitate violence. But is this a logical assertion? Isn’t this like condemning a robbed man because his possession of money precipitated the evil act of robbery? Isn’t this like condemning Socrates because his unswerving commitment to truth and his philosophical inquiries precipitated the act by the misguided populace in which they made him drink hemlock? Isn’t this like condemning Jesus because his unique God consciousness and never ceasing devotion to God’s will precipitated the evil act of crucifixion? We must come to see that, as the federal courts have consistently affirmed, it is wrong to urge an individual to cease his efforts to gain his basic constitutional rights because the quest may precipitate violence. Society must protect the robbed and punish the robber.

우리가 평화적으로 행동하더라도, 그 행동이 충돌을 유발한다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요.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가요? 강도라는 악행이 유발된 것에 대해, 돈을 많이 가진 탓을 할 건가요. 소크라테스가 결국 독배를 마시게 된 것은 끈질긴 진리 추구와 철학적 탐구로 시민들을 성가시게 만든 본인 탓으로 돌리고, 십자가 고난과 박해라는 죄를 인류가 저지르도록 만든 책임은 그리스도 자신의 창조주 신과의 교감과 신의 뜻에 대한 끝없는 헌신 탓으로 돌려야 하겠군요. 비록 그러한 행동이 폭력을 자극한다 할지라도 그 이유 때문에 자신의 헌법적 권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노력을 그만두도록 종용하는 것은 옳지 못함은 연방 법원도 여러 차례 천명한 바입니다. 강도는 벌하고 피해자는 보호하는 것이 사회가 할 일 아니던가요.

I had also hoped that the white moderate would reject the myth concerning time in relation to the struggle for freedom. I have just received a letter from a white brother in Texas. He writes: “All Christians know that the colored people will receive equal rights eventually, but it is possible that you are in too great a religious hurry. It has taken Christianity almost two thousand years to accomplish what it has. The teachings of Christ take time to come to earth.” Such an attitude stems from a tragic misconception of time, from the strangely irrational notion that there is something in the very flow of time that will inevitably cure all ills. Actually, time itself is neutral; it can be used either destructively or constructively. More and more I feel that the people of ill will have used time much more effectively than have the people of good will. We will have to repent in this generation not merely for the hateful words and actions of the bad people but for the appalling silence of the good people. Human progress never rolls in on wheels of inevitability; it comes through the tireless efforts of men willing to be coworkers with God, and without this hard work, time itself becomes an ally of the forces of social stagnation. We must use time creatively, in the knowledge that the time is always ripe to do right.

Now is the time to make real the promise of democracy and transform our pending national elegy into a creative psalm of brotherhood. Now is the time to lift our national policy from the quicksand of racial injustice to the solid rock of human dignity.

 

백인 중도주의자들은 (소위 깨어 있는 온건한 시민들은), 자유권을 찾고자 하는 몸부림과 관련하여 시기상조라는 프레임을 거부할 것이라는 내 믿음은 틀렸던 것 같습니다. 텍사스의 한 백인 동료 목회자(시민단체 관계자)는 다음과 같은 서신을 막 보내왔습니다. “모든 크리스천들은 유색인종도 나중의 언젠가는 동등한 권리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나, 당신은 지금 지나치게 성급하다. 지금에 도달하는 데도 기독교는 2천년이 걸렸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이 땅에서 실현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구요. 하지만 그러한 태도는 시간에 대한 슬프도록 잘못된 인식에서, 시간의 흐름이 결국 모든 악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묘하게 비이성적인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사실 시간 자체는 정의의 편에 서지 않습니다. 시간은 쓰기에 따라 파괴적으로도 건설적으로도 쓰일 수 있습니다. 선의를 가진 이들보다 악의를 가진 이들이 시간을 더 효과적으로 잘 쓴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 세대가 회개해야 하는 것은 악한 자들의 증오섞인 말들과 행동뿐만이 아니라 소위 선량한 이들의 소름끼칠듯한 침묵이기도 합니다. 인류의 발자취는 필연성의 바퀴 위에서 저절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신의 뜻을 함께 추구해 나가고자 하는 이들의 쉴틈없는 노력을 통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피나는 노력이 없다면, 시간 자체는 사회의 정체 및 퇴보와 한통속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창조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정의로운 일을 하는 데 시의적절한 시기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민주주의라는 이상을 현실에 구현하고, 국가적 비극을 연대의식의 찬송으로 바꾸기에 적절한 시점은 바로 지금입니다. 인종차별의 사상누각이 대신 인간 존엄성의 반석 위에 국가 정책을 올려놓기에 가장 알맞은 시점도 나중이 아닌, 바로 지금인 것입니다.